파나마시티 (Panamá)
1인당 GDP는 11,700달러이며, 《인터내셔널 리빙 매거진》(International Living Magazine)에 따르면 파나마는 지난 8년 동안 은퇴자를 위한 세계에서 5번째로 살기 좋은 곳으로 선정됐으며 높이 솟은 아파트 건물과 콘도로 구성된 빽빽한 스카이라인을 가지고 있고 또한 국제 금융과 상업상의 주요한 허브이다. 첨단 통신 서비스를 가지고 있으며, 인터넷 이용률이 높다. 파나마의 토쿠멘 국제공항은 매일 국제적인 행선지로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파나마시티는 1519년 8월 15일 설립됐다. 설립 수년 뒤 페루 정복과 탐험을 위한 중간 지점이 됐고 스페인을 향하는 금과 은의 통과 지점이 되었다. 1671년 1400명 무리와 웨일스 해적 헨리 모건은 파나마시티를 공격하고 약탈했으며 그 후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페허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오래된 파나마를 뜻하는 파나마라비에하(Panamá la Vieja)로서 알려진 인기있는 관광 명소이다. 파나마 시는 1673년 원래 도시의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복구되었다. 이 위치는 현재 파나마 시의 Casco Viejo로서 알려진다.
지도 - 파나마시티 (Panamá)
지도
나라 - 파나마
파나마의 국기 |
1501년 에스파냐인이 도착했을 때 75만 명의 인디언이 파나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탈·질병·살인 등으로 전체 인디언의 1/10이 죽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1514년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일명 페드라리아스)가 발보아를 물리쳤다. 1519년 페드라리아스는 파나마시티를 세우고 태평양 쪽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파나마는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에 물건을 옮기는 수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1748년까지 포르토벨로에서 열렸던 무역박람회에서는 1688년까지 파나마 해안을 약탈했던 영국 해적선이 관심을 끌었다. 1751년 파나마는 콜롬비아 산타페데보고타의 속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과 왕당파군을 격퇴한 후, 파나마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발적으로 콜롬비아 동맹과 결합했다. 1830년대에 콜롬비아에서 이탈하려고 3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