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빈성 (Tỉnh Hòa Bình)
2018년 호아빈은 인구 면에서 베트남의 49번째 성 단위였으며, 1인당 GRDP 30위, GRDP 기준 성장률 20위였다. 2018년을 기준으로 인구는 846,100명이며, 1인당 GRDP는 USD 2,098달러이며 GRDP 성장률은 8.36%에 도달했다.
호아빈 성은 1886년 6월 22일 므엉성이라는 이름의 통킹 칙령에 따라 헝호아성, 선떠이성, 하노이, 닌빈성에서 므엉 다수를 분할하여 만들어졌다. 호아빈이라는 이름은 한월어 화평(和平)을 베트남어로 독음한 것이다.
호아빈성은 다박현(Đà Bắc District) 쯔보(Chợ Bờ)에서 관리되었기 때문에 같은 해 11월경까지 쯔보성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프엉럼현(오늘날의 벗밧현)으로 이전되었다. 1888년 4월에 프랑스 식민지 당국에 의해 프엉럼성(Phương Lâm Province)으로 개칭되었다.
1891년 3월 1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은 지방의 이름이 6개 현(르엉선, 끼선, 락선, 락투이, 마이쩌우, 다박)을 가진 호아빈성으로 변경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의 행정 단위 변화는 다음과 같다.
* 1957년 10월 15일 떤락현이 락선현에서 떨어져 나와 형성되었다.
* 1959년 4월 17일, 낌보이현이 르엉선현에서 떨어져 나와 형성되었다.
* 1964년 8월 17일, 옌투이현이 락투이현의 일부에서 분리되어 형성되었다.
* 2001년 12월 12일, 까오퐁현이 끼선현의 일부에서 떨어져 나와 형성되었다.
* 2019년 12월 17일, 끼선현이 호아빈시에 합병되어 끼선방으로 변경되었다.
지도 - 호아빈성 (Tỉnh Hòa Bình)
지도
나라 - 베트남
베트남의 국기 |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92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통화 / 언어
ISO | 통화 | 상징 | 유효숫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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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D | 베트남 동 (Vietnamese đồng) | â‚« | 0 |